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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해동사 '해동명월(海東明月)'의 심오한 뜻 - 정남진 장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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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古土) 포함한 대한민국을 밝히는 가장 밝은 빛-안중근’을 장흥에 모신다

최근 MBC의 ‘테마기행 길’(제241회)의 ‘문림의향 장흥’편 방영(7월 24일)에서 해동사를 소개하는 장흥군 설명에서 ‘해동명월(海東明月)’을 거의 직역으로 “동쪽바다에 떠오르는 밝은 빛”으로 설명, 크게 아쉬웠다. ‘해동명월’은 직역만으로 결코 이해될 수 있는 사자성어(四字成語)가 아니다. 아주 심오한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 표현이다. 기왕지사, 이제 ‘해동명월(海東明月)’의 그 심오한 의미를 고찰해 보자.

‘해동(海東)이란 말이 처음 표기된 고서는 3세기 춘추전국시대에 저술된 지리서 <산해경>에서였다. 즉 “산해경에는, 해동에 군자국이 있어,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며, 사양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는다(山海經曰 海東有君子之國 衣冠帶劒 好讓不爭)”(<증보문헌비고>,권14 여지고8)는 기록이 그것이다(山海經 다른 원전에는, ‘海東’이 생략된 채 ‘君子國’으로만 표기돼 있기도 한다).

공자 7대손 공빈(孔斌)이 서기 268년에 쓴 <동이열전(東夷列傳)> ‘동이(東夷)’ 편에는 “동쪽에 있는 나라의 이름이 동이이다(東方有古國名曰東夷) …동쪽에 있는 예스러운 군자나라이다(可謂東方禮儀之君子國也)”고 표기, 산해경의 ‘해동 군자국’이 여기서는 ‘동방예의지국 군자국’으로 표기된다. 즉 <산해경>의 ‘해동’은 바로 ‘동이(東夷)’와 동의어였던 것이다.

우리나라 사서에서 ‘해동’의 등장은 <삼국사기>에서였다.

즉 ‘백제본기 제6 의자왕’편 3곳에서 ‘해동’이 등장된다. ‘의자왕’ 서문에 “의자왕은 …당시에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렀다”는 기록을 포함하여 “11년(651년) …해동의 삼국이 나라를 세운 지 오래인데…”, “…진(秦)·한(漢)나라 난리 때 중국인들이 많이 해동으로 달아난즉, (이들이) 삼국의 선조라고 한다”(의자왕 史論편) 등이 그것이다.

이밖에도 <삼기사기>에는 <해동고기(海東古記)>라는 원전이 인용되어 있으며 ‘해동의 일(海東之事)’ ‘해동불법의 시작(海東佛法之始)’이라는 말도 나온다. ‘해동신라’ 등 신라국을 ‘해동국’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황실(중국)의 딸이…진한으로 가 아들을 낳으니, 해동의 시조 왕(박혁거세)이 되었다”(三國史記 卷第十二 新羅本紀 第十二) 등의 표현 등이다.

<삼국유사>에도 ‘해동’이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국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또 고려 초에 편찬된 <삼국지(三國志)>를 의천(義天)은 <해동삼국사>로 인용해 쓰기도 했으며, <고려사><고려사절요>에도 ‘해동비록(海東秘錄)’이라는 서명으로 인용되어 있고, <동문선>에도 ‘해동’의 표현이 나온다(“우리 해동 삼국도 역사가 길고 오래되어 마땅히…”(<동문선> 권44 ‘표전’ 진삼국사기표).

고구려 패망 후 발해가 고구려 땅에 발기해 중흥기(818-830)를 이룩하며 당(唐과 친선 관계를 맺은 뒤 중국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리기도 하였다(<삼국유사> ‘권1 기이1 말갈발해조’). 이때 중국에서도 발해를 가리켜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불렀다(<신당서> ‘권219 열전144 북적 발해조’).

신라 말 최치원(857~?)도 ‘해동성자(海東聖者)’로 불렸다. 지금도 중국 장쑤성 양저우에는 ‘해동성자 최치원 기념관’을 조성해놓고 최치원을 기리고 있을 정도이다. 통일신라 말 서예가였던 김생(711~790?)도 왕희지에 비견되는 명필가로 ‘해동서성(海東書聖)’으로 불렸고, 고려 문종 때 유학자 최충(崔沖)도 공자처럼 많은 제자를 양성하며 ‘해동공자(海東孔子)라는 칭호를 얻었다. 조선조 세조 때 대문신 서거정(徐居正)은 명나라에서 명의 학자들과 문장과 시(詩)를 논하며 찬탄을 불러 일으켜 ‘해동(海東)의 기재(奇才)’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고려 이후 우리나라의 영역이 지금의 한반도로 거의 정착된 이후, 우리의 고토(古土)가 된 이전의 고구려와 발해 영토 확장을 추구하고 또 그 회복을 염원하는 의미에서 많은 사서들이 ‘해동(海東)’이라는 이름을 달고 편찬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 한치윤의 한국통사인 <해동역사(海東繹史)>를 비롯해 조선 초 신숙주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 고려 승려 각훈의 <해동고승전>, 조선 후기 홍만종의 <해동이적(海東異蹟)>, 황윤석의 <해동이적보(海東異蹟補)>, 조선 중엽 한무외의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 조선조 담촌거사의 <해동악부(海東樂府)>, 고려 화가 이전(李佺)의 <해동기로도상(海東耆老圖像)>, 조선조 김휴의 <해동문헌총록>, 조선조 김석주(金錫胄)의 <해동사부(海東辭賦)>, 조선조 서예가 최영년의 <해동죽지(海東竹枝)>, 조선조 김육이 편찬한 <해동명신록>, 조선조 정조 때 편찬된 작자 미상의<해동신감(海東臣鑑> 등이 그 단적인 예이다.

또 조선조에 처음으로 주조된 화폐의 명칭도 ‘해동통보(海東通寶)’였으며, <용비어천가> 제1장에서도 “해동육룡(海東六龍)이 날으샤”라고 하면서 이성계의 고조 목조(穆祖)로부터 태조(太祖-이성계), 태종(太宗-이방원) 까지 6대를 이른바 ‘해동국’의 용으로 표현했다.

이처럼 ‘해동(海東)’은 예전에 중국인들이 ‘바다 동쪽의 나라’라는 의미로서 우리나라를 ‘조선(朝鮮-古朝鮮), 동이(東夷), 청구(靑丘, 靑邱) 등으로 지칭하는 우리 국호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해동은 고려 이후 거의 대반한도로 굳어져버린 우리나라가 아니라, 옛 고조선의 영토, 고조선 이후의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영토, 통일신라 때의 발해 영역까지 아우르는, 예전의 우리 고토(古土)를 포함한 우리나라 전체를 지칭하는 국호의 하나였다.

명월(明月)은 밝은 달, 보름달을 일컫는다. 보름달만이 밤새 내내, 어둠(흑암)을 밝힌다. 즉 명월, 보름달만이 유일하게 밤을 가장 밝게 비치는 것이다.

이승만은 ’안중근 사당‘ 내걸릴 현판으로 ‘해동명월’을 적어주었다. 여기서 ‘해동’은 당연히 우리의 고토(古土)까지 포괄하는 대한민국이다. 안중근 당시는 일제강점기라는 암흑기였다. 안중근은 그 암흑기에서 해동국의 일대 광복(광명)을 가져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투쟁하다 순직하였다. 이승만 당시도 우리나라는 광복은 되었지만, 남북분단과 한국동란의 참화까지 겪은 암흑기였다. 하여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도 남북통일을 넘어 우리 고토까지 회복하려는 염원(희망)을 가졌을 법하다. 그리고 암흑기였던 일제치하뿐만 아니라 해방 후 남북분단으로 여전히 암흑기인 ‘해동국(國)’에서, 안중근을 그 ‘해동국’의 진정한 해방 실현을 추구하고 염원하는 일대 표상으로 상정했을 수 있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안중근의사가 ’암흑기 해동국을 유일하게 밝혀주는 가장 밝은 빛’이라는 의미로 ‘해동명월(海東明月)’이라는 사자성어를 써 주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고토까지 포함한 대한반도를 가장 밝게 밝혀주는 빛’, 그것도 ‘암흑기 해동국(대한민국)에 진정한 해방을 위한 가장 빛나는 빛인 안중근 의사‘를 장흥에 모신다는 의미에서, ‘해동명월’이 탄생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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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27, 2020 at 10:46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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